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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이 높아진만큼 많은 사람들이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디자인 된 라이프스타일은 공간에도 그대로 함께 반영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얘기하자면, 인테리어를 시작하기 전,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할 것은 라이프스타일 디자인입니다. 식생활에 더 신경을 쓰겠다든가, 독서량을 늘리겠다든가, 인간 관계를 좀 더 개선하겠다든가,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든가 하는 것들입니다. 그렇게하여 나의 라이프스타일과 그것이 실질적으로 실현될 공간이 일치되도록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집은 곧 나 자신입니다. 비도덕적인 사람일수록 집이 더럽고, 집이 더러울수록 비도덕적인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이론이 있듯이, 정돈되지 않은 라이프스타일을 가지고 있으면 공간도 정돈되지 않은 채 삶이 여러가지로 불편해질 것입니다. 오늘부터 더욱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디자인해나가길 바랍니다.

사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지구의 생명체는 끊임없이 무료함과 고통을 반복하면서 살아가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한 삶의 원리를 이해하고, 어떠한 결실이나 인정을 기대하기보다 스스로 원하는 삶에 최선을 다하는 그 과정 자체에 가치를 두는 것이 진정한 행복일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인간은 동물들과는 달리 예술과 철학을 통해 삶을 통찰하고,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선택지가 있습니다. 예술과 철학이라는 것은 복잡미묘한 인생을 작품으로써 표현한 것인데, 이렇게 시각/청각화함으로써 다른 사람과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삶을 살아가는 통찰력을 얻도록 도와줍니다. 이러한 삶의 위안을 통해 고통이나 고민 등을 지식으로써 승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막연히 떠도는 미래의 행복의 이미지들을 쫓아 삶을 허비하기보다는 예술 작품과 철학을 가까이하면서 '고통받는 존재'로서가 아닌 '세상을 아는 존재'로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따라서, 평소에 적극적으로 예술 작품을 찾아다니며 즐기고, 자신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에 화려한 가구나 최신형 기계들 대신 예술 작품들로 채워나간다면 지금보다 훨씬 지적이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술 작품에는 특정한 답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작가의 의도를 맞추려고 머리를 써서 노력하지 말고, 자신의 감정대로 느끼고 보이는대로 순수하게 감상해가면서 삶의 위안을 얻고 더욱 멋지게 가꾸어 나가면 어떨까요.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되도록 사람들과의 모임을 줄이고 독신으로 살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절친한 친구가 평균 2명정도로 밝혀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이용률은 급격히 증가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도시 생활에서의 낮은 응집력은 외로움을 증가시키고, 혹시 모를 위험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이웃이 없다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에 대한 대안으로 사생활 설정이 자유롭고 신체적 위협으로부터 안전한 온라인상에서 실용적으로 사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도시 생활을 하는 현대인들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등을 습관처럼 이용하는 것은 시골 사회나 오래 전의 농경 사회의 소규모 집단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모두가 잘 보이는 곳에서 생활하며 서로의 움직임을 눈으로 확인하며 안심하고 생활했던 것과 상당히 많이 닮아 있습니다. 페이스북 이용자 한명당 친구 수의 평균이 약 200명이라는 것 또한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인류학자 로빈 던바가 제안한 인간이 심리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관계로써 허용하는 '던바의 수' 150명에 가깝고, 신석기 시대의 농촌 사회의 평균 수나 오늘날 군대의 중대 하나당 크기의 평균 수와도 꽤 일치합니다. 즉,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하고자 하는 충동은 오래 전 농경 사회의 소규모 집단에서 통용되던 지속적인 사회 감시에 대한 갈증에서 유래하며, 현대인들이 도시 생활을 시작하면서 느끼게 된 분리의 불안과 공포에 대한 반응으로 보여집니다. 도시 설계자 찰스 몽고메리는 이러한 도시 생활의 해결책으로써 사람들과의 친화적인 행동을 이끌어내는 방향으로 도시를 재정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공공장소와 녹지를 늘리고 그것을 둘러싼 저층 주거지를 배치하여 서로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자는 것이 그 대안입니다. 도시의 인구 밀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르꼬르비지에에 의한 고층 아파트가 현대의 상당수의 도시에 자리잡게 되었지만, 인간의 생물학적, 정신적인 면을 고려했을 때, 아파트 보다는 이웃과 교류할 수 있는 저층 주거지가 더 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만약 저층 주거지에 거주할 수 없다면 가능한 한 이웃과 많이 교류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가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구축해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포클랜드를 중심으로 확산된 킨포크 문화와 같이 낯선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모여 소박한 나눔을 즐기면서 그 동안 도시 생활에서 잃고 살아왔던 것들을 다시 되찾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거대한 공간은 애초부터 우리가 저 높은 하늘에 닿을 것과 같이 천장을 높게 설계합니다. 예를 들어 고딕양식에서는 일정한 범위로 반복되는 프랙털 디자인과 유사한 요소를 통해 천장에 하늘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은 환각을 일으키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주변 공간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뇌 구조가 있는데, 주변 공간이라고 함은 수평으로 이어지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안의 공간을 말하고, 그 외의 공간은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없는 외부 공간으로 범위지어집니다. 명상, 종료 체험, 환각 등에서는 신체 경계가 사라지고 신경 활동이 주변 공간 조직에서 멀어져 외부 공간 조직으로 나아가면서 합일화된 현상을 보입니다. 거대한 공간에 들어섰을 때 우리의 시선이 위로 향하면서 제 3의 눈으로 보게 되고 그와 동시에 외부 공간 정보 처리 기제가 활성화됩니다. 즉, 시선이 위로 향함으로써 평범한 일상과 단순히 생존을 위한 행동 및 자기 보호, 궁극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고 더 큰 존재로 자아를 인식하게 되며 혹은 신성한 존재와 연결되는 긍정적인 위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뇌 구조를 파악하여 우리의 존재가 균형을 잡고 더 큰 존재로서의 삶을 일궈나갈 수 있게 해주는 비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설계자에게 아무런 제약없이 상상력을 마음껏 펼쳐서 공간을 설계하도록 허용하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보통은 완성된 공간에 대해 설계자의 비전과 이용자의 의견 단절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계자의 미학적 판단과 보통 사람들의 기호가 크게 어긋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그 차이는 교육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결국 공간을 이용하는 것은 설계자가 아니라 이용자인 것이므로 그 공간이 설계자의 예술 작품으로써의 가치로 여겨지거나 설계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이용자의 부족함으로 책임이 전가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공간은 그림이나 영화, 음악과는 달리 완성된 순간부터 수명을 다할 때까지 공간의 기능 즉, 이용자의 공간 이용 목적을 충실히 수행하고 긍정적인 기여를 할 책임이 따르게 됩니다. 르꼬르비지에의 철저한 설계 철학에 따른 공간들은 현대까지 계속하여 기계처럼 아류작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르꼬르비지에나 그 아류작들이 이용자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그 원인으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사람'의 우선 순위가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설계학적 원리로만으로 공간을 만든다면 인간의 신경계의 원시적 배열을 무시한 단절된 방향으로 나아가버리고, 과학적 원리만으로 공간을 만든다면 융통성 없는 해법만 제시하는 권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가장 좋은 공간은 이용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간이며, 설계학적 이론과 과학적 이론은 이용자의 전후 맥락과 라이프스타일 등을 고려하여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이용자는 전문가들의 의도를 경청하고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밝혀진 정보들을 올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를 올바르고 전문적으로 돕기 위해 이용자의 환경에 대한 반응이나 생리 반응(심박수, 체온, 생활 패턴 등)을 데이터화하여 분석하고 공간에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 빠른 시일내에 이용 가능해질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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